강원도는 타지역보다 넓고, 같은 도내 영서~영동을 오가는데만도 시간이 적지 않게 걸린다.
타 지역 처럼 실내 촬영 스튜디오가 없어, 강원도에서 촬영 하다가 남양주 양수리 촬영소나 대전, 전주 촬영 스튜디오로 빠져 나가 작품의 상당 부분을
강원도에서 촬영하던 적지 않은 제작진들에게 아쉽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에 당장 쉽지않은 촬영 스튜디오의 차선책으로 산 많은 강원도 한적한 곳에 자리한 구, 에어백 공장 건물을 발견하여 적극 소개 하고자 한다.
강원도 횡성군 횡성읍 남산리에 자리한 10년째 방치 중인 구, 공장 건물로서 주변에는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큰 대로변도 없어 차량 통행은 거의 없다.
사진의 건물은 1870평에 건물 안 센터 기준으로 천장 높이가 9미터다.
건물 안으로 탑차 등이 들어 갈 수 있는 큰 문이 있으며, 한 쪽 공간에는 천장에 조명을 거치 시킬 수 있는 바도 있다.
건물 중앙에 중심 기둥들이 있어 아쉽고, 창문이 좀 많아 흠이지만 흑지 등으로 가릴 수 있을 것으로 사려되며, 평일 낮 시간에 종종 전투기가 지나가 소음에
취약함이 있을 수 있다. 전투기와 더불어 우천시의 소음 또한 취약 할 수 있다.
서울에서 90분 거리에 있는 횡성의 간이 촬영 스튜디오로 많은 영화/방송 드라마/CF/뮤직 비디오 제작진들이 오시길 기대 한다.
숙박 - 2~3KM 횡성읍 모텔 有
식사 - 밥차 이용시, 넓은 대지 이용 및 횡성읍 재래시장/식당 有
천장 높이 - 9M
19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물레방아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백전리 물레방아
화암면 소재지로부터 약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부락으로 주변은 잦나무가 주 군락을 이루고 소하천을 사이로 정선군과 삼척군 하장면이 인접하여 있다. 물레방아는 화암면사무소 기점 동남방 약 12km 지점 우측 하천변에 건립되어 있으며 하천을 사이로 삼척시와 시 ·군 경계를 이루고 있다. 물레방아(방아실) 규모는 약 3평 정도의 목조(木造)로 지붕은 저릅을 사용 전형적인 산간 마을 가옥형체를 보존하고 있다. 문헌 등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지역 주민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시대말(1890년) 농경 생활을 영위하던 토착민들이 자연의 힘을 이용농산물 가공을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정선군 화암면 백전리와 삼척시 하장면 한소리 주민이 이용하고 있다. 이 곳 물레방아에는 약 600여년 전부터 이 고장에 불려 지기 시작한 정선아리랑 노랫말 속에 물레방아와 비유한 인간 삶의 애환을 노래한 구절이 많이 불려지고 있다. 물레방아는 우리들의 식생활 문화(食生活 文化)에 없어서는 안될 긴요한 생활용구(生活用具)로서 현재 보존되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이므로 민속학적(民俗學的) 가치(價値)와 함께 후세(後世)에 도정 문화를 교육 할 수 있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이 기대된다.
* 출처 : 정선관광홈페이지 http://www.ariaritour.com/
삼척향교
종 목 : 강원도유형문화재 102호
분 류 : 향교
수 량 : 1동
지정일 : 1985.01.17
소유자 : 향교재단
관리자 : 향교재단
삼척의 향교는 태조7년(1398)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해오고 있는데, 그 이전의 삼척지방 교육기관에 관해서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학교입니다. 이름 높은 성현을 제사하는 임무와 지방의 유생을 모아 강학하는 교육적 기능을 가지는 동시에 향토사회의 문화를 향상시키고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순화하는 교육적 임무도 있어 유교정신을 진작시키는 중심체 역할을 했습니다. 삼척시 교동 삼척초등학교 뒷편에 자리한 삼척향교는 조선 태조7년(1398) 지금의 고사리재 동쪽 기슭인 고사음곡에 처음 건립하였다가 ,태종7년(1407) 부사 권전이 현재의 당저동에 해당하는 옥서동으로 이전했으며, 세종21년(1439)에는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를 세웠습니다. 세조14년(1468) 현 위치인 교동으로 이전하면서 먼저 학생들의 기숙사격인 동재(東齋). 서재(西齋)를 지었습니다. 성종 원년(1470)에 대성전을 건축하고, 다음 해에는 생도를 40명에서 70명으로 증원했습니다. 원래 삼척도호부에는 생도의 정원이 40명이었습니다. br> 성종3년(1472) 남루인 명륜당을 세웠으며, 선조9년(1576) 부사 김효원이 제물(祭物)창고인 자성고( 盛庫)를 짓고, 선조13년(1580) 부사 황정식이 명륜당의 출입구(南樓戶爽)와 들창(齋廚)을 만들었습니다. 현종6년(1665) 동무 서무를 건립하고, 효종7년(1656) 부사 이지온이 대소인원개하마비(大小人員皆下馬碑)를 세우고, 망료석함(望燎石函)을 만들었습니다. 숙종8년(1682) 부사 유송제는 향교를 중수한다면서 건지동으로 이전하였다가 유림들의 반발로 상부에 발각, 체포되고 간사 최동흘은 강릉에 수감되었다가 다음 해에 풀려났습니다. 숙종26년(1700) 부사 심단이 현 위치로 다시 옮기려고 터를 닦아 다름 해 이건하였으며, 1710년 부사 이성조가 대성전이란 현판을 쓰고 명륜당을 중수한 후 주자필을 모사하여 명륜당이란 현판도 게첨하였습니다. 그 당시 대성전 터를 삼화사에 머물던 연총섭이란 스님이 잡았는데 양반들이 득세하면 중이 행세를 못하므로 삼척향교 양반들이 득세못하도록 대성전의 터를 석자 세치 낮추게 했다합니다. 그래서 향교의 안산격인 봉황산이 중의 삿갓처럼 보이게 하고, 건물 전체를 땅비둘기 형국으로 만들어 향교 양반들을 파멸하도록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옵니다.
문의전화
삼척시청 문화공보실 : 033-570-3223
삼척향교 : 033-574-2432, 7271
* 출처 : 삼척문화관광 http://tour.samcheok.go.kr/
홍서대
종 목 : 강원도민속자료 2호
분 류 : 복식
수 량 : 1점
지정일 : 1979.05.30
소유자 : 삼척김씨종중
관리자 : 삼척김씨종중
조선시대 벼슬을 가진 관리가 한복(韓服)이나 공복(公服) 등의 겉옷에 두르던 띠로 겉에 물소뿔로 만든 장식이 달려 있어 달리 서대(犀帶)라 한다. 조선시대(朝鮮時代) 법전(法典)인 《대전회통(大典會通)》에는 정1품의 관리가 조복(朝服), 제복(祭服), 공복, 상복(常服) 등의 옷을 입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관(冠), 복(服), 홀(笏), 패옥(佩玉) 등과 함께 서대(犀帶)는 중요한 의장(儀章)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홍서대(紅犀帶)는 태조 2년(1393) 삼척이 목조비(穆祖妃)의 외향(外鄕)이고, 선대묘(先代墓)인 준경묘·영경묘가 소재하는 곳이라 하여 삼척지역을 부(府)로 승격시키는 한편 홍서대 1점을 하사하고 삼척 부사로 하여금 봉안토록 한 것이다. 영조(英祖) 29년(1753) 삼척 부사 이토협(李土夾)이 관아(官衙) 구기(舊基)를 수리하다가 서대 및 기책(記冊)을 발견하고 이를 조정에 상주(上奏)한 바 영조(英祖)가 어제홍서대기(御製紅犀帶記)를 내리니 홍서대각을 짓고 봉안하였으나, 고종 12년(1875) 현 삼척 김씨 재사(齋舍)인 실직왕묘(悉直王廟)로 이관되었다. 서대는 한지를 여러겹 아교로 붙여 띠를 만들고 밖으로 물소뿔을 얇게 다듬어 오려 붙였으며 앞에는 장착을 위한 금속구가 달려 있다. 현재 실직왕묘내 보대운한각(寶帶雲漢閣)에는 홍서대와 서대기책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문의전화
삼척시 문화공보실 : 033-570-3224
* 출처 : 삼척문화관광 http://tour.samcheok.go.kr/
동해향교
동해는 1980년 4월 1일 명주군 묵호읍과 삼척군 북평읍을 합하여 동해시가 되면서 각 기관과 사회단체는 통합되었으나, 유림조직만 묵호지역은 강릉향교로 북평지역은 삼척향교로 분리된채 13년이 흐르므로서 유림사회는 구심점이 없었으며 문화행사에도 유림이 소외되는 등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유림의 구심점인 향교건립을 추진키로하고 1990년 4월 유생 8인이 동해문화원에 모여 동해향교 건립을 결의하였다. 1993년 12월 19일 강원도 재단 이사장 朴鶴周를 경유하여 金敬洙 성균관장에게 향교 건립 승인신청서를 제출하여 1994년 2월 28일 동해향교 건립 승인을 받았다. 1993년 9월 11일 동해향교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동시에 儒道會 동해지부를 결성하였다. 동해시교육장 韓基台로부터 동해시 부곡동 254-1번지에 논 200평을 기증받아 향교부지로 정하고 대성전과 동·서무를 비롯하여 많은 부속 건물을 지었다. 동해향교 초대 전교는 한서우였다. 東九位는 설총, 안유, 김굉필, 조광조, 이황, 이이, 김장생, 김집, 송준길을, 西九位는 최치원, 정몽주, 정여창, 이언적, 김인후, 성혼, 조헌, 송시열, 박세채를 祭享하였다. 1995년 3월 16일 文廟文宣王影幀函과 주독위패 그리고 五聖, 孔門十哲, 宋朝六賢, 東國十八賢 등 39位의 祭床과 香爐床, 司尊床 등 제반 부속상들이 제작되었다. 이어서 쌍용양회와 朴汶植, 金仁淑, 李貞任 등 제위로부터 후원과 헌금이 있었으며, 직임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동년 6월 29일에 향교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로서 동년 4월 15일 위패 39위를 봉안하는 고유제를 거행할 수 있었으며, 이어서 6월 29일에는 개교할 수 있었다. 1996년 8월에 기공된 명륜당은 47평 규모로 1997년 1월 20일 준공되었고, 1997년 9월 13일 동·서무 각 8평과 동·서재 각 12평 공사를 착공하였고, 1998년에는 신삼문 건립과 동년 12월 묘정비를 세웠다. 현재 동해향교 내에는 향교창건기, 대성전상량문, 명륜당신축상량문, 묘정비 등이 있다.
* 출처 : 동해시청 http://www.dh.go.kr/
* 관련사이트 : 동해향교 http://www.dh-hg.net/
옛날집 (구 중화당한의원)
강원도 강릉시 성남동 109-2번지에 있는 한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전문음식점. ‘오래된 집’이라는 뜻에서 옛날집으로 이름 지었다. 30년 전 한정식 집으로 개업하였다. 건평 70평의 1층 건물로 큰 방이 4개, 작은 방이 2개이며, 100명을 수용한다. 강릉 시내 택시부광장 옆 금방 골목에서 50m에 위치한다. 정감 어린 옛 전통한옥을 개조한 한정식 집으로 ‘강릉하면 옛날집’이라고 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처음 개업한 주인은 서울로 진출하였고 1988년 현재의 주인인 안춘애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오색약수돌솥밥은 찹쌀에 약수를 넣어 밥을 짓기 때문에 푸르스름한 색깔을 띠며 윤기가 난다. 여기에 은행·밤·대추·인삼·콩 등이 들어간 영양밥에 직접 담근 고추장과 된장으로 끓인 된장찌개가 나온다. 반찬으로는 초당두부부침과 대관령 등지의 산에서 채취한 10여 가지의 산나물과 삼색전, 각종 젓갈, 버섯볶음, 도토리묵, 생선회(오징어, 문어, 심퉁이), 장어구이, 고등어구이, 이면수구이 등 30여 가지가 된다. 옛날집의 별미는 구수한 숭늉을 돌솥에 부어 만든 눌은밥이다. 각종 TV 및 잡지에도 자주 소개되었으며 1996년 전통문화보존명인장을 수상하였다.
* 출처 : 디지털강릉문화대전 http://gangneung.grandculture.net/
강릉향교
1. 소개
향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 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강릉향교는 1313년(충선왕 5)에 강릉존무사 김승인(金承印)이 현재의 자리인 화부산(花浮山)에 창건하였다. 1411년(태종 11)에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2년 뒤에 판관 이맹상(李孟常)의 발의로 다시 세웠으나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수리를 하였는데, 6·25 전쟁 때에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1909년에 화산학교를 설립하여 신학문을 교육하였고, 일제 시대에는 강릉농업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에는 명륜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초정일(初丁日)에 석전대제(釋奠大祭)를 거행하고 있다. 강릉향교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하여 사성(四聖)·십철(十哲)·육현(六賢)을 봉안한 대성전(大成殿)과 우리나라의 18선현(先賢)과 중국의 유명한 유학자를 봉안한 동무(東)·서무(西)가 있고, 강론을 하던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이 기숙을 하던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건물이 있다. 이 중 대성전은 보물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문의처 : 033-648-3667 (오전에만 전화가 가능함)
* 출처 : 강릉관광홈페이지 https://tour.gangneu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