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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객사문 | |||||||||||||||||||||||||
강릉시 | |||||||||||||||||||||||||
210-210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 |||||||||||||||||||||||||
강릉시청 | |||||||||||||||||||||||||
강릉 객사문
종 목 : 국보 제51호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관아 수량/면적 : 1동 지 정 일 : 1962.12.20 소 재 지 :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강릉시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객사란 고려< 高麗 >와 조선시대< 朝鮮時代 >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사< 官舍 >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정전< 正殿 >에 국왕< 國王 >의 전패< 殿牌 >를 모시어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망배< 向闕望拜 >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유숙< 留宿 >하게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太祖 > 19년(936) 본부< 本府 > 객사로 총 83칸의 건물을 창건하고 임영관< 臨瀛館 >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恭愍王 > 15년(1366) 왕이 낙산사< 洛山寺 >로 행차 도중 현액을 친필< 親筆 >로 썼다고 전한다. 그후 수차 중수< 重修 >되어 오다가 1929년 일제< 日帝 >시 강릉공립보통학교(후에 강릉국민학교가 됨) 시설로 이용되었고 동교< 同校 >가 헐린 뒤에는 공지< 空地 >로 남게 되었다. 1967년 12월 여기에 강릉경찰서 청사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이 문만이 남게 되었다. 남산의 오성정< 五星亭 >, 금산의 월화정< 月花亭 >, 경포의 방해정< 放海亭 > 등은 객사의 일부이었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 이 문은 간결하고 소박하고 주심포계< 柱心包系 >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삼문< 三門 >이다. 기둥의 배흘림은 현존해 있는 목조건축< 木造建築 > 유구< 遺構 > 중 가장 크고 주두< 柱頭 >와 소로< 小累 >의 굽은 곡을 이루고 굽받침을 두었으며 단장혀< 短長舌 >로 외목도리< 外目道理 >를 받게 하였다. 또한 쇠서< 牛舌 >, 첨차< 첨遮 > 화반< 花盤 >, 보< 樑 > 등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高麗時代 > 건축양식< 建築樣式 >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 출처 : 문화재청 http://www.cha.go.kr/ |